작년 110일 오후에 뇌출혈이 일어난 뒤 1년이 지났다. 정상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 느낌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뇌출혈의 영향을 받은 좌측 시야는 작년 8월까지 계속 좋아져서 거의 뇌출혈 발병 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가 8월 중순에 갑자기 좌측 시야가 안 좋아지더니, 복시(겹보임) 현상이 심해져 눈을 뜨고 있으면 가벼운 어지럼증이 계속 될 정도였다. 이 복시 현상은 왼쪽 시야와 오른쪽 시야의 상이 서로 일치하지 않아서 생기는 복시 현상이라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눈을 뜨면 세상이 겹쳐 보여서 때때로 눈을 감고 있는 것이 더 편안해졌다. 5개월이 지난 지금은 조금 나아져서 겹보임도 조금 나아졌고 그에 따라 어지럼증도 사라졌다.

작년 8월부터의 좌측 시각 상태를 정확히 말하자면 왼눈의 좌반구가 약한 반맹 상태이다.

거울을 보면 좌우로 길쭉한 타원형의 눈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시각은 눈 영역의 1/4씩 나누어서 신호를 전달한다. 아래 그림을 보라.

 

왼눈 좌측시야 반맹은 왼눈 중 좌측이 안 보이는 것이다. 아래의 그림을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아래 그림은 안과에 가면 하는 시야검사의 결과이다. 아래 시야검사지는 왼눈의 좌측 절반과 오른눈의 우측 절반이 안 보이는 환자의 것이다. 나는 이 중 오른눈은 멀쩡하고 왼눈의 좌측 절반이 안 보인다. 물론 다 안 보이는 것은 아니고, 약하게만 안 보이는 약한 반맹이다.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서서 분주히 오가는 수많은 인파를 바라보면 좌측 시야의 좌측 영역을 지나가는 인파가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반맹인 사람의 시야 측정 사진. 새카맣게 보이는 부분은 시각체계가 보지 못하는 영역을 표시한다. 반맹은 시야의 절반을 보지 못하는 상태이다. 

 

<이 그림들의 출처는 모두 아그점빵 블로그이다>

 

이는 왼눈 좌측 영역의 시신경이 손상을 입어서 시각 신호를 제대로 후두엽에 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를 미치게 하는 것은 왜 갑자기 8월부터 좌측에 약한 반맹이 시작되었는가이다. 그전까지는 계속 나아지고 있다가, 심지어 810일쯤에는 매우 상태가 좋아서 운전을 할 정도였다. 지금도 왜 갑자기 약한 반맹이 되었는지 이유를 모른다. 11월에 신경과 의사 면담시 물어보았더니, 상태가 좋아지다가 갑자기 악화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오른눈은 병원 치료를 포기했다. 12월에 아산병원 안과가서 정밀검사를 했는데, 망막 수술로 인해, 아니 정확히는 수술 중 망막이 찢어져서 망막을 붙인다고 레이저로 망막을 다 지져놓았다. 그래서 일부 망막이 지금도 휘어져있고, 이것을 펼 방법은 없다. 게다가 망막 수술의 후유증으로 백내장까지 있어 오른눈은 사물의 형체를 구별할 정도의 역할 밖에 하지 못한다. 백내장 수술을 하면 흐릿하게 보이는 것은 나아지겠지만, 그래도 망막의 문제는 남아있기 때문에 의사는 그다지 시력이 좋아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오른눈은 포기했다.

하여튼, 현재 상태는 왼눈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보게 하려고 고군분투 중이다. 시야 상태가 많이 안 좋을 때는 어지럽기 때문에 눈을 감는다. 눈을 감으면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진다. 엉망진창인 시야는 오히려 마음을 엉클어뜨린다. 1년 전만 해도 실명과 어둠의 공포에 시달렸지만, 이제는 어둠이 편안하다. 눈을 감고 외부에서 전해오는 시각을 차단하면 오히려 자유로움을 느낀다. 시각은 오히려 나를 특정 세계만 인식하도록 하는, 나의 인식과 상상력을 특정 세계에 제한하는 인식 수단이다.

뇌출혈은 나에게 여러 가지 영향을 미쳤는데, 가장 큰 영향은 세계를 인식하는 나의 생각을 바꾸었다는 점에 있다. 그것은 하나의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비슷하다. 그런데 마음조차 뇌가 만들어내는 것이므로, 보다 정확하게는 일체유뇌조(一切唯腦造)라고 생각한다. 일체는 오로지 뇌가 창조한다. 수많은 뇌과학자들은 이 세계는 나의 뇌가 만든 환상일 수도 있다고 얘기한다. 최근 카를로 로벨리라는 이탈리아 물리학자가 쓴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를 읽었는데, 물리학자들은 시간도 뇌가 만든 환상일 가능성이 있다고 얘기하고 있다. 시간과 공간을 포함한 이 세계가 나의 뇌가 만든 환상이라면 뒤집어 생각하면 나는 나의 창조주라고 할 수 있다.

뇌출혈 1년 동안 내가 깨달은 것은 나는 내 세계의 창조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보는 시야는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살아가는 나의 세계일 뿐이다. 그러니 남들과 다르게 세계를 지각한다고 해서 불편하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는다. 그저 이 기묘한 세계에서 태연자약하게 살아갈 뿐이다.

Posted by Chul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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