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변줄 좀 빼주세요응급실에서 끼워놓은 소변줄이 주기적으로 방광을 자극하는 것이 계속 불쾌감을 주었다.

왜요

팔다리 멀쩡한데 소변줄 빼도 되지 않나요대체 왜 응급실에서 소변줄을 끼웠는지 이해 못 할 일이었다. 뇌출혈이라도 팔다리 멀쩡한 거 알았으면 안 끼웠어야 하는 것 아닌가.

잠시만요

잠시만요 하더니 몇 시간 뒤에야 소변줄을 빼러 왔다.

여기다 소변 보세요간호사가 소변통을 침대 옆에 끼웠다.

걸어다닐 수 있는데 화장실가서 볼게요.”

소변이 얼마나 나오는지 확인해야하니까 소변통에 보세요.”

소변을 보고 나면 간호사가 와서 소변통을 확인하고는 방광에 초음파 검사를 했다.

소변이 남았나 보려고요, 남아 있으면 빼야 되거든요.”

그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뒷날 생각해보니 방광암 환자도 아닌데 왜 소변을 확인하려 했을까 궁금증이 들었다. 아마도 뇌가 방광을 인식하지 못해 소변이 다 나오지 않을까봐 확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방광을 인식하는 뇌세포가 망가지면 당연히 소변을 보라는 명령을 못 내릴 것이고, 그럼 소변이 안 나왔을 수도 있다. 이 생각을 하다 보니 얼마 전에 대한뇌졸중학회 홈페이지 FAQ란에서 읽은 글이 생각난다. 한 남편이 질문하기를 자기 아내가 뇌졸중 환자인데 왼쪽 팔을 자꾸 침대 아래로 축 늘어뜨린 채로 있으면서 모른 척 해서 간호사가 그러지 말라고 해도 자꾸 그런다면서 어떻게 해야 좋은 지를 묻는 것이다. 아마 이 질문이 뇌출혈에 대한 세간의 인식 수준을 보여주는 대표적 질문으로 보인다. 그 아내는 왼쪽 팔을 모르는 척 하는 게 아니라 왼쪽 팔이 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뇌질환 중에는 자기 팔다리가 있는데도 없다고 생각하는 질환이 있다고 한다. 뇌에서 팔다리가 없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없어야 할 팔다리가 있기 때문에 그로부터 엄청난 고통이 온다고 한다. 그래서 이 질환을 앓는 유럽의 일부 환자들은 몰래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에 가서 팔다리를 잘라내고 온다고 한다.

 

뇌혈관집중치료실에 가서는 계속 잠이 쏟아졌다. 누군가 깨우지 않으면 계속 잠을 잤다. 잠은 이튿날까지 쏟아졌는데 깨어 있으려 노력해도 어느 새 자고 있었다.

왜 이렇게 졸리죠

간호사에게 물어보았다.

계속 졸려요?”

좋은 거 아닌가요. 뇌가 수면을 원하는 것 같은데.”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수면은 뇌출혈 환자의 회복에 무척이나 중요한 치유법이었다. 환자가 계속 잠을 잘 때는 내버려 두는 것이 제일 좋은데 병원은 그렇지 않았다. 간호사들은 8시간마다 교대를 했는데 그때마다 교대한 간호사가 환자들 상태를 새로 체크했었다.

안녕하세요. 오늘이 며칠이에요? 여기가 어디에요?”

왼팔 들어보세요. 오른팔 들어보세요. 왼쪽 다리 들어보세요. 오른쪽 다리요

왼팔을 긁으며 감각 있어요?” 다시 오른팔을 긁으며 감각 있어요?”

한번은 내 주치의가 나처럼 젊은 사람들은 어쩌고저쩌고하길래 속으로 내가 젊다고?’하며 놀랬는데, 뇌혈관 환자들은 대부분 60세 이상이었다. 그러다보니 귀가 잘 안 들리는 환자들도 꽤 있었다. 그런 환자들에게는 간호사들이 소리를 질렀다.

할머니!!!! 할머니!! 내 말 들려??? 오늘이 며칠이이예요???”

 

하루 만에 혈압을 내리는 약 투여를 중단할 정도로 혈압은 안정되었지만, 내 눈은 여전히 잘 안 보였다. 사물이 뭉그러져 보이고 경계가 명확치 않아 분간이 어려웠다.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보았는데 눈이 여섯 개로 보였다. 마치 내가 괴물 같았다. 깨어서 혼자 있을 때는 공포심이 들기도 했다.

이러다 영영 지금처럼 보이는 거 아닌가. 미쳐 버리겠네

그러면 아무 것도 못할 텐데 죽어야 하지 않나

수년 째 집필 중인 주역 책은 쓰고 눈이 안 보였으면 좋았을 텐데.’

어떻게 자살해야 좋을지 그 방법을 두고 고민하기도 했다. 칼 하나 들고 깊은 산 속에 들어가 혼자 손목 긋고 죽어야 하나, 어떤 방법이 좋을까.

앞이 안 보인다는 것은 엄청난 공포를 유발한다. 앞이 보이는 사람들은 결코 그 감정을 알 수 없다. 지금 두 눈을 감고 20초만 있어보라. 그리고 그 상태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보라. 그냥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이튿날 오후 옆 침대에 새로운 환자가 들어왔다. 나이는 나보다 열 살 정도 많았는데, 뇌경색이 재발해서 입원한 환자였다. 몇 년 전 입원했었는데 그 후 약을 꾸준히 먹다가 최근에 괜찮은 것 같아서 약을 먹지 않았단다. 아침에 약속이 있어서 신발 신던 중 다리 마비로 쓰러졌는데, 약속이 있어서 우선 일을 처리하고 나서 병원으로 왔다고 했다. 담배는 하루 서너갑씩 피우던 것을 한갑 정도로 줄였지만 여전히 흡연 중이었고, 술도 마시는, 뇌경색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분이셨다. 술은 뇌졸중 발병률을 서너배 정도 높인다. 담배는 말해 무엇하랴.

그 환자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사는 게 뭔지 모르겠다며 얘기하길래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환자에게 내가 겪어 본 죽음을 들려주었다.

삼십여 년 전 사고를 당해 응급으로 병원에 실려 갔을 때의 일이었다. 엑스레이를 찍기 위해 침대에 실려 엑스레이실로 옮겨졌다. 숨을 거의 못 쉬어서 호흡기에 의존해 숨을 헐떡이고 있는데 갑자기 엑스레이 기사가 촬영에 방해된다며 양쪽 코에 들어가 있던 호흡기 줄을 빼버린 것이었다. 아마도 그 사람은 내가 숨을 쉴 수 있는 줄 알았던 것 같다. 호흡기 줄을 빼버리자 마자 숨을 쉴 수가 없었고 몇 번 크게 헐떡인 나는 숨을 멈췄다. 숨이 멈춰지면서 잠을 자는 것처럼 깊은 암흑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졸리네, 자자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고통 없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찰나였다. 그렇게 깊은 잠에 빠져들고 있는데 떠드는 소리가 났다. “야 숨을 안 쉬잖아!” 그리고 기사들이 급하게 호흡기 줄을 다시 내 코에 끼웠다. 산소공급이 다시 시작되었고, 잠은 저만치 달아나버렸다.

자살을 생각하며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머리 속에서는 이미 죽음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나는 남과 다르게 죽음을 겪어보기도 했다. 죽음은 무()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우주 자체가 없음에서 태어났으니 나도 없음으로 돌아가고 우주도 결국 엔트로피의 법칙으로 인해 열 죽음을 맞아 없음으로 돌아간다. 과학자들은 이 거대한 우주에서 나라는 한 개체의 죽음은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우주적으로는 아무 의미 없는 죽음이라고. 근데 과연 그럴까. 내가 죽으면 내 주위 사람들에게 슬픔과 충격을 안겨줄텐데, 그게 아무 의미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나의 죽음이 우주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생사일여(生死一如). 삶과 죽음은 하나라는 것은 삶과 죽음이 같은 본질이라는 뜻이 아니다. 동양철학에서 일()이란 도()를 뜻한다. 태어나 살고 때되면 죽는 것의 자연의 도라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음양 관계이다. 음양이란 중국사상용어로는 대대(待對)이다. 앞의 대()기대다, 의지하다는 뜻이고 뒤의 대()대립하다는 뜻이다. 철학자 전대호는 이를 하나됨이란 맞선 둘의 얽힘이란 멋진 용어로 정리하였다. 삶과 죽음은 하나이지만 맞서서 투쟁하며, 삶이 없으면 죽음도 없고, 죽음이 없으면 삶도 없는 관계인 것이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강렬하게 살고 싶어졌다. 죽음이 두려워졌다. 삶에 대한 애착이 그리 크지 않고, 욕망이 거의 없었던 나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삶에 대한 욕망이 강렬해졌다. 레이 커즈와일 생각이 났다. 2040년쯤에는 인간의 수명을 무한대로 늘려줄 인공지능이 탄생할 것이라고 예측하며, 그때까지 살기 위해 자신이 만든 특수한 약을 마시고, 하루에 녹차를 10잔씩 마시는 괴짜 인공지능 전문가. 커즈와일은 올해 71살이지만, 나는 46살이다. 2040년이 되어도 나는 지금의 커즈와일 나이도 안 된다. 내가 커즈와일보다 훨씬 젊은 몸으로 영생을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물론 커즈와일이 얘기하는 영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영생과는 다르지만. 어쨌든, 나는 살기로 결심했다. 오래 살아서 인류가 진보하는 모습들을 보고 즐기기로 했다.

Posted by Chul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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