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변줄 좀 빼주세요응급실에서 끼워놓은 소변줄이 주기적으로 방광을 자극하는 것이 계속 불쾌감을 주었다.

왜요

팔다리 멀쩡한데 소변줄 빼도 되지 않나요대체 왜 응급실에서 소변줄을 끼웠는지 이해 못 할 일이었다. 뇌출혈이라도 팔다리 멀쩡한 거 알았으면 안 끼웠어야 하는 것 아닌가.

잠시만요

잠시만요 하더니 몇 시간 뒤에야 소변줄을 빼러 왔다.

여기다 소변 보세요간호사가 소변통을 침대 옆에 끼웠다.

걸어다닐 수 있는데 화장실가서 볼게요.”

소변이 얼마나 나오는지 확인해야하니까 소변통에 보세요.”

소변을 보고 나면 간호사가 와서 소변통을 확인하고는 방광에 초음파 검사를 했다.

소변이 남았나 보려고요, 남아 있으면 빼야 되거든요.”

그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뒷날 생각해보니 방광암 환자도 아닌데 왜 소변을 확인하려 했을까 궁금증이 들었다. 아마도 뇌가 방광을 인식하지 못해 소변이 다 나오지 않을까봐 확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방광을 인식하는 뇌세포가 망가지면 당연히 소변을 보라는 명령을 못 내릴 것이고, 그럼 소변이 안 나왔을 수도 있다. 이 생각을 하다 보니 얼마 전에 대한뇌졸중학회 홈페이지 FAQ란에서 읽은 글이 생각난다. 한 남편이 질문하기를 자기 아내가 뇌졸중 환자인데 왼쪽 팔을 자꾸 침대 아래로 축 늘어뜨린 채로 있으면서 모른 척 해서 간호사가 그러지 말라고 해도 자꾸 그런다면서 어떻게 해야 좋은 지를 묻는 것이다. 아마 이 질문이 뇌출혈에 대한 세간의 인식 수준을 보여주는 대표적 질문으로 보인다. 그 아내는 왼쪽 팔을 모르는 척 하는 게 아니라 왼쪽 팔이 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뇌질환 중에는 자기 팔다리가 있는데도 없다고 생각하는 질환이 있다고 한다. 뇌에서 팔다리가 없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없어야 할 팔다리가 있기 때문에 그로부터 엄청난 고통이 온다고 한다. 그래서 이 질환을 앓는 유럽의 일부 환자들은 몰래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에 가서 팔다리를 잘라내고 온다고 한다.

 

뇌혈관집중치료실에 가서는 계속 잠이 쏟아졌다. 누군가 깨우지 않으면 계속 잠을 잤다. 잠은 이튿날까지 쏟아졌는데 깨어 있으려 노력해도 어느 새 자고 있었다.

왜 이렇게 졸리죠

간호사에게 물어보았다.

계속 졸려요?”

좋은 거 아닌가요. 뇌가 수면을 원하는 것 같은데.”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수면은 뇌출혈 환자의 회복에 무척이나 중요한 치유법이었다. 환자가 계속 잠을 잘 때는 내버려 두는 것이 제일 좋은데 병원은 그렇지 않았다. 간호사들은 8시간마다 교대를 했는데 그때마다 교대한 간호사가 환자들 상태를 새로 체크했었다.

안녕하세요. 오늘이 며칠이에요? 여기가 어디에요?”

왼팔 들어보세요. 오른팔 들어보세요. 왼쪽 다리 들어보세요. 오른쪽 다리요

왼팔을 긁으며 감각 있어요?” 다시 오른팔을 긁으며 감각 있어요?”

한번은 내 주치의가 나처럼 젊은 사람들은 어쩌고저쩌고하길래 속으로 내가 젊다고?’하며 놀랬는데, 뇌혈관 환자들은 대부분 60세 이상이었다. 그러다보니 귀가 잘 안 들리는 환자들도 꽤 있었다. 그런 환자들에게는 간호사들이 소리를 질렀다.

할머니!!!! 할머니!! 내 말 들려??? 오늘이 며칠이이예요???”

 

하루 만에 혈압을 내리는 약 투여를 중단할 정도로 혈압은 안정되었지만, 내 눈은 여전히 잘 안 보였다. 사물이 뭉그러져 보이고 경계가 명확치 않아 분간이 어려웠다.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보았는데 눈이 여섯 개로 보였다. 마치 내가 괴물 같았다. 깨어서 혼자 있을 때는 공포심이 들기도 했다.

이러다 영영 지금처럼 보이는 거 아닌가. 미쳐 버리겠네

그러면 아무 것도 못할 텐데 죽어야 하지 않나

수년 째 집필 중인 주역 책은 쓰고 눈이 안 보였으면 좋았을 텐데.’

어떻게 자살해야 좋을지 그 방법을 두고 고민하기도 했다. 칼 하나 들고 깊은 산 속에 들어가 혼자 손목 긋고 죽어야 하나, 어떤 방법이 좋을까.

앞이 안 보인다는 것은 엄청난 공포를 유발한다. 앞이 보이는 사람들은 결코 그 감정을 알 수 없다. 지금 두 눈을 감고 20초만 있어보라. 그리고 그 상태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보라. 그냥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이튿날 오후 옆 침대에 새로운 환자가 들어왔다. 나이는 나보다 열 살 정도 많았는데, 뇌경색이 재발해서 입원한 환자였다. 몇 년 전 입원했었는데 그 후 약을 꾸준히 먹다가 최근에 괜찮은 것 같아서 약을 먹지 않았단다. 아침에 약속이 있어서 신발 신던 중 다리 마비로 쓰러졌는데, 약속이 있어서 우선 일을 처리하고 나서 병원으로 왔다고 했다. 담배는 하루 서너갑씩 피우던 것을 한갑 정도로 줄였지만 여전히 흡연 중이었고, 술도 마시는, 뇌경색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분이셨다. 술은 뇌졸중 발병률을 서너배 정도 높인다. 담배는 말해 무엇하랴.

그 환자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사는 게 뭔지 모르겠다며 얘기하길래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환자에게 내가 겪어 본 죽음을 들려주었다.

삼십여 년 전 사고를 당해 응급으로 병원에 실려 갔을 때의 일이었다. 엑스레이를 찍기 위해 침대에 실려 엑스레이실로 옮겨졌다. 숨을 거의 못 쉬어서 호흡기에 의존해 숨을 헐떡이고 있는데 갑자기 엑스레이 기사가 촬영에 방해된다며 양쪽 코에 들어가 있던 호흡기 줄을 빼버린 것이었다. 아마도 그 사람은 내가 숨을 쉴 수 있는 줄 알았던 것 같다. 호흡기 줄을 빼버리자 마자 숨을 쉴 수가 없었고 몇 번 크게 헐떡인 나는 숨을 멈췄다. 숨이 멈춰지면서 잠을 자는 것처럼 깊은 암흑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졸리네, 자자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고통 없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찰나였다. 그렇게 깊은 잠에 빠져들고 있는데 떠드는 소리가 났다. “야 숨을 안 쉬잖아!” 그리고 기사들이 급하게 호흡기 줄을 다시 내 코에 끼웠다. 산소공급이 다시 시작되었고, 잠은 저만치 달아나버렸다.

자살을 생각하며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머리 속에서는 이미 죽음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나는 남과 다르게 죽음을 겪어보기도 했다. 죽음은 무()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우주 자체가 없음에서 태어났으니 나도 없음으로 돌아가고 우주도 결국 엔트로피의 법칙으로 인해 열 죽음을 맞아 없음으로 돌아간다. 과학자들은 이 거대한 우주에서 나라는 한 개체의 죽음은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우주적으로는 아무 의미 없는 죽음이라고. 근데 과연 그럴까. 내가 죽으면 내 주위 사람들에게 슬픔과 충격을 안겨줄텐데, 그게 아무 의미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나의 죽음이 우주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생사일여(生死一如). 삶과 죽음은 하나라는 것은 삶과 죽음이 같은 본질이라는 뜻이 아니다. 동양철학에서 일()이란 도()를 뜻한다. 태어나 살고 때되면 죽는 것의 자연의 도라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음양 관계이다. 음양이란 중국사상용어로는 대대(待對)이다. 앞의 대()기대다, 의지하다는 뜻이고 뒤의 대()대립하다는 뜻이다. 철학자 전대호는 이를 하나됨이란 맞선 둘의 얽힘이란 멋진 용어로 정리하였다. 삶과 죽음은 하나이지만 맞서서 투쟁하며, 삶이 없으면 죽음도 없고, 죽음이 없으면 삶도 없는 관계인 것이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강렬하게 살고 싶어졌다. 죽음이 두려워졌다. 삶에 대한 애착이 그리 크지 않고, 욕망이 거의 없었던 나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삶에 대한 욕망이 강렬해졌다. 레이 커즈와일 생각이 났다. 2040년쯤에는 인간의 수명을 무한대로 늘려줄 인공지능이 탄생할 것이라고 예측하며, 그때까지 살기 위해 자신이 만든 특수한 약을 마시고, 하루에 녹차를 10잔씩 마시는 괴짜 인공지능 전문가. 커즈와일은 올해 71살이지만, 나는 46살이다. 2040년이 되어도 나는 지금의 커즈와일 나이도 안 된다. 내가 커즈와일보다 훨씬 젊은 몸으로 영생을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물론 커즈와일이 얘기하는 영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영생과는 다르지만. 어쨌든, 나는 살기로 결심했다. 오래 살아서 인류가 진보하는 모습들을 보고 즐기기로 했다.

Posted by Chul Lee
,

바둑의 기원은 주역(周易)이다

 

동양고전연구가 이철

 

얼마 전 이세돌 9단과 대국을 펼쳤던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의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문득 바둑의 기원이 주역(周易)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역은 사서삼경 중 하나로, 세계의 구조와 그 운행의 원리를 담고 있는 책이다. 바둑의 기원이 주역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건, 바둑에서 흑돌과 백돌이 서로 맞서 대국을 펼치는 것이 주역에서 음과 양이 서로 맞얽혀 사건이 전개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국기원 홈페이지에서 바둑의 기원을 찾아보았더니 요임금 제작설, 박혁 기원설, 천체관측도구 기원설의 세 가지 설을 제시하고 있다. 요임금 제작설의 기원은 3세기에 집필된 박물지라는 책인데, 대만과 일본의 학자들에 의해 오래 전에 근거 없음이 밝혀졌으므로 언급할 가치가 없다. 천체관측도구 기원설은 오청원이 일본 기사와의 대담에서 말한 것으로, 이 또한 오청원 개인의 근거 없는 상상에 불과하다.

박혁 기원설에서 박혁은 논어에 나오는 놀이이다. 박혁과 바둑의 연관설은 고대의 경전인 맹자, 춘추좌전, 관자와 고대 무덤에서 발굴된 상해박물관 소장 죽간 초서등을 통해서도 밝혀져 있다. 하지만 공자가 말한 박혁이 바둑이라고 해도,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박혁이란 놀이를 행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어원으로 보자면 박혁이 바둑의 기원일 수 있지만, 놀이 과정이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바둑과 박혁의 기원이 무엇인지 다시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을 뿐이다.

한국기원 홈페이지에는 없지만, <바둑학연구>에 실린 논문 바둑의 기원과 관련된 박혁의 의미에 대한 문헌 연구 및 고찰(김달수)에 따르면 그 외의 기원설에는 점복 기원설과 하도낙서 기원설이 있다. 점복기원설은 은허를 비롯한 고대 중국의 수도에서 발굴된 갑골문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다. 갑골문은 갑골복을 행하는 과정과 결과를 갑골에 새긴 글이다. 갑골(甲骨)이란 단어는 귀갑(龜甲)과 수골(獸骨)에서 을 따와서 만든 글자로, 귀갑은 거북 껍데기’, 수골은 짐승뼈를 뜻한다. ()은 이 갑골을 불에 태웠을 때 나타나는 갈라진 무늬를 상형화한 글자로, 이 무늬가 신이 내리는 징조라고 생각한 고대 중국인들은 이를 해석해 인간사의 길흉을 단정하고 미래를 예측하였다. 한 일본 연구자는 지금의 19도 바둑이 8도 반상으로부터 유래했다고 주장하면서, 8도 반상과 점복의 연관을 주장하였다.

숫자 8은 고대의 점복과 깊은 관련이 있는 숫자이다. 주역점을 고대에서는 서()라고 불렀는데, 일부 주역연구자들은 이 서()가 고대에 있었던 여덟 가닥의 소털로 짠 끈으로 치는 점으로부터 유래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또 주나라의 관직제도를 기술한 책인 주례에서는 점인이 갑골복도 관장하여 팔서(八筮)로 팔송(八頌)을 점치고, 팔괘로 팔고(八故)를 점쳐 그 길흉을 살폈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한 일본 연구자의 주장처럼 바둑이 8도 반상에서 출발했다면 실제로 바둑이 점복에서 기원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주장도 8도 반상의 실물이 발굴되기 전까지는 주장으로만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도낙서 기원설에서 하()는 황하, ()은 황하의 지류인 낙수이다. 하도란 황하에서 나온 그림[()]를 말하고, 낙서란 낙수에서 나온 글[()]을 뜻한다. 그런데 처음에는 하도와 낙서가 같이 등장하지 않았다.

중국 진나라 이전 시대의 문헌 가운데 하도라는 글이 최초로 기록되어 있는 곳은 논어이다.

 

공자는 말했다. 봉황도 오지 않고 황하에서 그림도 나오지 않으니, 나도 이제 끝인가 보다!” - 논어, <자한>

 

공자가 말한 황하에서의 그림이 하도(河圖)이다. 그런데 공자는 하도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았다. 봉황은 성왕이 출현하면 나타난다는 전설의 새이다. 공자가 봉황에 이어 하도를 말한 것을 보면 하도 역시 성왕이 출현하면 나타나는 사물 중 하나인 것이 분명하다. 논어다음에 나타나는 문장은 주역<계사전>이다.

 

황하에서 그림이 나오고, 낙수에서 글이 나왔는데, 성인이 이를 본떴다. - 주역<계사전> 11.

 

<계사전>은 주역의 큰 뜻을 통론한 문헌으로 중국의 전국 시대(기원전 403~ 기원전 221)에 편찬되었다. 계사전의 문장에서 최초로 하도에 이어 낙서가 보인다. 그러나 <계사전>에서도 하도와 낙서가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하도와 낙서가 출현하는 책은 서경이다.

 

화산에서 난 구슬 및 동쪽 오랑캐의 구슬과 하늘빛 구슬 및 황하에서 난 그림은

동쪽 행랑에 놓았다. - 서경<주서周書고명顧命>

 

하도는 서경 본문에 나오지만 낙서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낙서는 후한 때의 학자 정현이 단 주()에 나온다.

 

그림은 황하에서 나왔으니 제왕이 받는 것이다. 그 아래 낙서 두 글자가 있다

 

서경은 위서 논쟁이 있는 책이라 사실 그 내용을 전부 신뢰하기가 어렵다. 어쨌든 서경에도 하도와 낙서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정현의 주에 따르면 하도와 낙서는 제왕의 상징물로 보인다.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았던 하도와 낙서에 대한 최초의 설명은 한나라 대의 공안국과 유흠에 의해 이루어졌다. 공안국과 유흠은 하도에서 주역 팔괘가 나오고, ‘낙서에서 홍범 구주가 나왔다고 설명하였다.

 

하도는 복희가 천하를 다스릴 때 용마(龍馬)가 황하에서 나와 마침내 그 무늬를 본떠 팔괘를 그렸다. 낙서는 우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때 신명스런 거북이 등에 무늬를 나열해 놓았는데 그 수가 9에 이르렀으니, 우임금이 이에 따라 차례를 정하여 아홉 개의 법을 이루었다. - 위상서공씨전

 

공안국과 유흠의 주장은 주역<계사전>에서 성인이 하도와 낙서를 본떴다고 하자, 그것에 말을 보태서 성인이 하도와 낙서를 본떠 팔괘와 구주를 만들었다고 설명한 것이다. 즉 아무런 근거 없이 만들어낸 말에 불과하다. 이들은 말로만 성인이 하도와 낙서를 본떠 팔괘와 구주를 만들었다고 떠들었지, 하도는 어떤 그림이고 낙서는 어떤 내용의 글인지 전혀 설명하지 않았고, 나아가 그것으로부터 어떻게 팔괘와 구주가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도 한마디 설명이 없다.

그러던 것이 갑자기 송나라 대에 이르러 현재에 보는 바와 같은 하도와 낙서의 그림이 출현하게 되었다.

 

그림 1. 하도. 동그라미의 개수에 주목해야 한다. 다 더하면 55가 나온다.
그림 2. 낙서. 동그라미의 개수를 다 더하면 45가 나온다.

송나라 대는 도서역(圖書易)이 유행하였는데, 우리나라의 국기인 태극기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하도와 낙서의 그림도 도서역파들이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이 그림들이 주희가 쓴 역학계몽에 실리면서 조선과 중국, 일본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 하도낙서의 그림이 바둑의 기원이라고 하는 것은 기원전에 만들어진 바둑이 12세기에 만들어진 하도낙서로부터 유래했다고 하는 것이니 미래가 과거의 뿌리라고 하는 것과 같다.

필자는 기존 바둑 기원설과 다른 측면에서 주역을 바둑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주역의 사유와 바둑 규칙의 연관성으로, 바둑의 규칙에 주역의 사유가 반영되어 있으므로, 바둑의 기원이 주역이라는 것이다.

첫번째 바둑의 규칙은 흑과 백이 서로 맞서 두어야 한다는 점이다. 흑과 백은 서로 맞서 싸우며 죽이려고 한다. 마침내 한 일방이 죽으면 승부가 가려지고 바둑이 끝난다. 바둑이 끝나면 죽지 않은 한 일방도 역할이 사라진다. 바둑판 위의 생기 넘치는 흑돌과 백돌이 아니라 그냥 검고 흰 의미 없는 돌덩어리가 된다. 이 사실은 흑돌과 백돌이 서로의 생존 근거임을 뜻한다. 즉 흑돌과 백돌은 서로 맞서서 싸우며 상대방을 죽이려 하지만, 상대방의 존재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이런 바둑의 규칙은 주역의 음양 사유와 닮았다. 음양은 세계가 ‘맞품음’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을 상징화한 언어이다. 맞품음이란 맞섬과 품음을 합쳐서 필자가 만든 조어로, 서로 맞서면서 서로를 품고 있는 두 인소로 구성되어 있음을 말한 것이다. 맞품음은 맞선 둘은 서로를 품고 있으면서 동시에 품은 하나는 둘로 갈라져 맞서 있는 법칙을 말한다. 맞섬이란 두 인소의 대립을 말한 것이며, 얽힘이란 두 인소가 서로의 존재 근거임을 말한 것이다. 왼쪽이 있어야 오른쪽이 있고, 위가 있어야 아래가 있고, 앞이 있어야 뒤가 있고, 흑돌이 있어야 백돌이 있다. 이 때 왼쪽과 오른쪽, 위와 아래, 앞과 뒤, 흑돌과 백돌은 맞얽힘의 관계이다. 왼쪽과 오른쪽은 맞서고 있지만 왼쪽이 없으면 오른쪽이 없으므로 얽혀 있는 관계이다. 백돌과 흰돌은 맞서 싸워 서로를 죽이려고 하지만, 백돌이 없으면 흑돌도 없으므로 서로 얽혀 있는 관계이다. 맞서면서도 얽혀 있는 관계, 그것이 맞얽힘의 관계이다. 이러한 세계의 기본 구조를 《주역》은 음과 양의 복합명사인 음양으로 표현한 것이다. 음과 양은 맞서면서도 얽혀있는 두 인소를 상징하는 언어이다. 따라서 음과 양은 다른 언어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실제로 《주역》에서 음과 양은 몇 번 나오지 않고, 대신 강(剛)과 유(柔)라는 단어가 주로 쓰인다. 강은 ‘굳셈’, 유는 ‘부드러움’을 뜻한다. 굳셈과 부드러움이라는 서로 반대되는 성질을 가지고 맞얽힘의 구조를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와 --는 음양의 상징기호이자, 세계의 맞얽힘 구조를 상징하는 기호이다. 이 음양 기호를 바둑의 흑돌과 백돌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그리고 바둑의 흑돌과 백돌이 서로 얽혀 변화를 만들어내듯이 주역에서는 ―와 --이 서로 변화하여 세계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정리하면, 흑돌과 백돌이 맞서 싸우는 바둑의 규칙은 주역의 맞얽힘 사유를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바둑의 모든 변화는 흑돌과 백돌의 맞얽힘으로부터 생겨나고, 이 변화는 무한대에 가깝다.

두 번째 바둑의 규칙은, 흑과 백이 번갈아 가면서 둔다는 것이다. 이 규칙은 주역 계사전의 “한 번은 음이 되고, 한 번은 양이 된다”를 연상시킨다. 계사전은 주역에 대한 열 개의 해설 중 하나로, 주역의 세계관을 설명하고 있다. 한 번은 음이 되고, 한 번은 양이 된다는 말은 음(--)이 계속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맞얽혀 있는 양(―)으로 변화하고, 양 또한 음으로 변화하면서 한 국면이나 사건의 변화가 만들어짐을 말한 것이다. 즉 이 말은 주역에서 만물의 생성변화의 원리, 동력을 표현한 말이다. 이를 계사전의 다른 문장에서는 “강유(剛柔, 굳셈과 부드러움)이 서로 밀고 나아가서 변화를 낳는다. 변화는 나아감과 물러남의 상이고, 강유는 낮과 밤의 상이다.”라고 설명하였다. 굳셈이 부드러움을 밀치고 나아가 부드러움의 자리를 차지하면 부드러움이 굳셈으로 변하고, 부드러움이 굳셈을 밀치고 나아가 굳셈의 자리를 차지하면 굳셈이 부드러움으로 변한다. 이는 마치 낮이 물러가야 밤이 오고, 밤이 물러가야 낮이 오는 것과 같다.

바둑에서도 한 번은 백돌이 놓여지고, 한 번은 흑돌이 놓여지면서 국면이 전개된다. 흑돌과 백돌이 번갈아 가며 판 위에 배치됨으로써 바둑이 시작되고 국면의 전개와 변화가 펼쳐진다. 그렇게 한바탕 흐드러지게 피어나던 변화는 끝내 한 일방이 죽으면 멈추고 바둑이 끝난다. 그리고 바둑의 끝남은 우주의 죽음을 뜻한다.

세 번째 바둑의 규칙은 ‘집’이다. 돌이 살기 위해서는 ‘집’이 있어야 하고, 누가 더 집을 많이 지었느냐가 승패를 가른다. 여기서 집을 house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바둑에서 집은 ‘시공간’을 의미한다.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루황~ 집우 집주 넓을홍 거칠황~’으로 시작하는 천자문은 집이 우주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우주는 무한한 시간과 만물을 포함하고 있는 끝없는 공간의 총체를 뜻한다. 우주는 무한한 시공간이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이 독립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얽혀 있다는 사유는 주역의 괘에서 드러나고 있다. 괘는 ―, -- 이 여섯 번 겹쳐져 있는 그림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네 개의 괘를 알고 있는데, 태극기에 있는 건䷀, 곤䷁, 감䷜, 리䷝가 그것이다. 태극기에 있는 괘는 획이 세 개인 삼획괘이고, 《주역》에서는 획이 여섯 개인 육획괘를 사용한다. 이 획들은 ‘효(爻)’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주역》에서 하나의 괘는 여섯 개의 효로 구성되어 있고, 효는 두 가지 종류의 획 ―,-- 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획으로 이루어진 ―는 구(九, 9) 또는 양효, 두 획으로 이루어진 --는 육(六, 6) 또는 음효라 부른다. 이 효들은 괘 안에서 구별하기 위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효의 이름을 통칭하여 ‘효제’라고 한다. 효제는 괘를 이루고 있는 두 효의 성질과 시공간에서의 위치를 구분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준괘의 괘상을 보면 효 앞에 초구, 육이, 육삼, 육사, 구오, 상육이 적혀 있다. 이것이 효제(爻題)이다. 효제는 효의 성질 + 효의 시공간에서의 위치를 나타내는 숫자로 조합되어 있다. 효의 성질이란, 음, 양을 말한다. 음, 양을 숫자로는 각각 육(六), 구(九)로 표기한다. 그리고 효의 위치, 즉 효위(爻位)란 하나의 효가 괘 속에서 어느 자리에 있는지를 말한다. 효위는 초(初), 이(二), 삼(三), 사(四), 오(五), 상(上)을 사용하여 표기한다. 괘는 아래에서부터 위로 읽는데, 제일 아래에 있는 효는 늘 초(初)로 시작한다. 초는 처음, 시작이라는 뜻으로, 괘가 시작함을 알리는 것이다. 그리고 제일 위에 있는 효제는 늘 상(上)자를 붙여 읽는데, 상은 꼭대기라는 뜻이다. 제일 아래에 있는 효를 ‘시작’한다는 뜻인 초를 붙였으면, 제일 위에 있는 효는 끝난다는 뜻인 종(終) 정도를 붙였어야 한다. 그러나 그 대신 꼭대기를 뜻하는 상(上)을 붙였다. 꼭대기는 공간에서의 위치를 말한다. 초는 시간, 상은 공간에서의 위치를 뜻한다. 이는 시공을 하나의 개념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공은 우리가 살아가는 집이며, 변화가 펼쳐지는 곳이라는 주역에서의 시공 인식은 바둑의 ‘집’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나아가 바둑에서는 살기 위해서는 ‘두 집’이 있어야 한다. 삼십년 전 필자가 친구에게 바둑을 처음 배울 때가 생각난다. 두 집이 있어야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는 바둑판 위에 한 집, 아래에 한 집을 두었었다. 친구의 설명에는 중요한 개념이 빠진 것이다. 그것은 ‘연결’이다. 생존의 근거인 두 집은 ‘연결된 두 집’이어야 한다. ‘연결된 두 집’이란 개념은 완벽한 생존의 시공간으로서의 한 집과 한 집이 서로 얽어있어야 함을 뜻한다. 하나의 집과 하나의 집이 서로 얽혀 있는 형태의 두 집 구조가 최소한의 생존의 기반이다. 여기서 완벽한 형태의 하나의 집은 맞얽혀 있는 두 인소 중 하나이다. 음양 중의 하나이고, 좌우 중에 하나이고, 앞뒤 중에 하나이고, 위아래 중에 하나이다. 즉, 연결된 두 집은 쌍으로 생성된 맞얽힘 구조를 가진다. 바둑에서 연결된 두 집을 최소한의 생존 기반으로 규칙화한 것은 이 맞얽힘 구조를 규칙화한 것이다.

나아가 두 집만 얽혀 얽혀 있는 것이 아니라, 반상 위의 모든 돌이 서로 얽혀 있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 제2국에서 알파고가 둔 37수를 보고 경기해설가들과 이세돌 9단이 놀라워하며 혼란스러워한다. 우중간 화점에 한 줄 아래에 있는 백돌(이세돌)을 어깨짚은 흑돌(알파고)의 한수. 이 한 수로 제2국의 승부가 결정되었는데, 이는 바둑돌 하나하나가 모든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중간에 둔 한 수가 곧이어 벌어질 좌하귀 전투의 승패를 결정지었고, 이는 결국 바둑의 승부로 연결되었다. 이처럼 바둑은 돌 하나도 허투루 착수할 수 없는 경기인데, 이는 돌 하나하나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바둑의 특징은 주역의 세계관에서도 드러난다. 주역에서 하나의 괘는 하나의 사건을 의미한다. 이 사건은 바둑에서 하나의 국면과 같다. 바둑에서 각 국면이 연결되듯이 주역에서도 하나의 괘는 나머지 63개의 괘와 연결되어 있다. 주역을 펼치면 제일 먼저 건괘가 나오고 그 다음에는 곤괘, 다음에는 준괘가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배치의 의미는 우주가 건, 곤으로부터 생성되고, 다음에 준괘를 통해 만물이 생성되고 그 이후 펼쳐지는 변화를 따라 순서대로 배치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괘는 앞의 괘로부터 생성되고 뒤의 괘의 출현에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주역 64괘가 전부 얽혀 있다. 그리고 반상위의 모든 돌이 얽혀 있는 것은 흑돌과 백돌의 맞얽힘 구조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바둑의 규칙과 주역 사유의 연관성을 보았을 때 바둑의 기원은 주역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주역은 맞얽힘을 우주만물의 생멸과 변화의 원인이자 동력으로 보고 있다. 바둑은 흑돌과 백돌의 맞얽힘을 구조로 하여 만든 놀이이다. 바둑은 주역의 세계관을 모사하여 우주의 생성과 변화, 그리고 소멸을 바둑판 위에서 펼치는 놀이이다. 즉 바둑은 주역의 세계관을 모사한 우주론 놀이이다.

Posted by Chul Lee
,

뇌출혈?’

뇌에서 피가 난다고? 근데 왜 왼쪽 눈이 안 보이는 거지?’

나는 뇌출혈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다. 얼마나 심각한 병인지도 몰랐고, 내 마음은 오직 왜 눈이 안 보이는가에만 쏠려 있었다. 오른쪽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통증은 링겔에 혈압을 내리는 약을 투여하면서 사라져갔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하필 오른쪽 눈에 통증이 왔을까 궁금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의사에게 설명을 듣지 못했다.(다음 방문진료시 물어 볼 것!)

뇌출혈 판정이 난 뒤, 응급실에서 병동으로 이송되었다. 나중에 보니 뇌혈관집중치료실이었다. 뇌출혈이나 뇌경색 등 뇌혈관에 문제가 생긴 환자들만 모아놓은 치료실이었다. 이곳은 보호자조차도 하루에 면회시간이 10분으로 제한되어 있고, 보호자 아닌 방문객은 하루 1명에 한해서만 면회가 가능했다. 보호자조차도 치료실 출입할 때에 ID카드가 있어야만 하는, 그런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내 머릿속에는 뇌출혈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병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열시쯤, 해외여행 갔다가 막 귀국한 아내가 도착했다. 나는 괜찮다며 놀라지 말라고 안심시켰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왜냐면 아내는 병치료계의 프로였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20185월에 전정신경염(어지러워서 걷지도 못한다)과 급성 당뇨 그리고 당뇨합병증인 황반변성으로 인한 실명위기(실제로 앞이 안 보였다)까지 겪었는데, 평생 당뇨를 껴안고 살아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자기만의 치료법을 개발하여. 8개월 만에 당뇨완치판정을 받아 의사가 두손 두발을 다 들게 한 고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주치가가 웃으면서 오더니 이제 술 다 드셨네요하는 것이었다. “너무 웃으시는 거 아니예요.”라며 대꾸하며 한심을 쉬었다. 의사로부터 나의 뇌출혈 증세에 대한 설명을 들었는데, 우측 후두부에 뇌출혈이 발생했고 뇌의 우측과 신체의 왼쪽이 연결되어 있어 왼쪽눈이 안 보이는 것이라고 하였다. 좌뇌는 신체의 오른쪽, 우뇌는 왼쪽으로 연결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내 몸으로 직접 그것을 체험하게 될 줄은 몰랐다. 눈앞이 안 보여서 걱정되고 답답하기는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 신기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눈은 멀쩡한데 뇌가 보지 못하는 것이라니 말이다. 그러면서 이런 질문이 들었다. “본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마지막으로 의사는 경미한 뇌출혈이므로 뇌를 여는 수술을 하지는 않고 경과를 두고 보자고 했다. 출혈이 멈추고 피가 스며들 때까지는 2~3개월정도 걸릴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왼쪽 눈의 시력에 대해서는 사흘 뒤 퇴원을 앞두고 정확한 설명을 들었는데, 피에 적셔진 뇌세포는 죽으며, 죽은 뇌세포는 절대’(레지던트는 절대를 강조했다)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몇 십 년 뒤에 뇌CT를 찍어도 죽은 뇌세포가 그대로 찍힌다고 했다. 그리고 내 왼쪽 눈 시력은 그대로인데 시야가 좁아진 것이라며, - 정확하게는 시야를 담당하는 일부 뇌세포들이 죽은 것이다 - 다른 뇌세포들이 죽은 뇌세포의 기능을 대체하거나 내가 적응하면 괜찮아 질 것이라고 했다.

의사의 설명을 듣고 난 뒤 들었던 생각은 다른 세포들은 피에 젖었다고 죽지 않는데 왜 뇌세포는 피에 젖으면 죽는 걸까’ ‘다른 세포는 다 재생되는데 뇌세포는 왜 살아나지 못하는 거지라는 두 가지 궁금증이 일었다.

한편 나는 의사의 말을 믿지 않기로 했다. 나의 뇌세포는 다시 살아날 것이며 반드시 원래대로 시야를 회복할 수 있음을 증명하기로 결심했다. 두 달이 지난 지금, 뇌세포가 살아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야는 뇌출혈이 일어나기 전의 8,90퍼센트 정도 회복된 걸로 추산된다. 뇌출혈집중치료실에 있을 때 장님처럼 손을 앞으로 내밀고 휘저으며 걸어야 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회복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죽은 뇌세포는 절대 살아나지 않는다는 의사 말은 틀린 말은 아닐지 몰라도 그다지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다. 일부 뇌세포의 죽음은 에 달하는 뉴론(neuron, 신경세포)의 네트워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네트워크 상에 있는 일부 뇌세포가 죽었다면 그 뇌세포를 우회하는 새로운 네트워크 경로를 만들면 되는 것이었다. 마치 인터넷 망처럼 말이다. 그리고 죽은 뇌세포가 살아날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는 것 같았다.

하여튼 경미한 뇌출혈 환자였던 내가 병원에서 받은 치료라고는 혈압을 내리는 약을 투여받은 것뿐이었고, 그마저도 혈압이 안정화되자 더는 약을 투여하지 않았다. 이튿날부터는 집중치료실이 있는 8층으로 제한해서 걷기 운동을 해도 된다는 의사의 처방이 내려졌다. 의사는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많이 걸으라고 했다.

나중에 다음과 네이버에서 뇌출혈로 검색해보니 뇌출혈 전조증상이라는 자동검색어가 뜨는 것을 보았다. 참고로 뇌출혈 전조증상을 말하자면 내가 겪은 시야가 이상하게 보이는 현상, 엄청난 통증을 일으키는 두통(나는 안통이었다), 언어능력 저하, 팔다리 마비 등이 있다. 의사들은 이런 종류를 전조증상이라 하던데,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전조라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보이는 기미인데, 뇌출혈은 출혈이 시작되어야만 이런 증상이 생기기 때문에 전조증상이란 표현보다는 초기 증상이라는 표현이 정확한 표현이다. 뇌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뇌에 문제가 생긴다해도 인간은 이런 초기 증상을 통해서만 뇌출혈 여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뇌세포에게는 피가 독과 같기 때문에 뇌출혈이 발생하면 초 단위로 뇌세포가 죽어간다. 따라서 얼마냐 빨리 병원에 가느냐에 따라 이승에 남느냐 저승에 가느냐가 달려 있고, 살았다 하더라도 머리를 여는 수술을 하게 되는지의 여부가 달려 있다. 병원에서 내가 들은 사례로는 술에 취해 들어온 아들이 주말 내내 방에서 꼼짝도 안하기에 자는 줄 알고 내버려뒀는데 월요일이 되어서도 일어나지 않기에 그때서야 병원으로 데려갔으나 너무 늦어서 두개수술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뇌출혈이 발병하고 12시간 뒤에서야 병원에 갔는데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할는지 모르겠다. 처음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을 때 119에 전화하지 않은 걸 무척 후회했다. 내 옆에 있던 환자는 아침에 신발 신다가 다리 마비로 쓰러져서 병원으로 왔으니 무척 빨리 온 셈이었다. 근데 이 환자는 재발이었다!

뇌출혈은 뇌졸중의 일종으로, 뇌졸중(腦卒中)은 뇌출혈과 뇌경색으로 나눠진다. 뇌졸중은 맞춤법 시험에서 사람들이 많이 틀리는 단어 중 하나로, 뇌졸증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뇌졸중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로 중풍으로 불렸던 병으로, 중풍의 중도 가운데 중()을 쓴다. 이에 대해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왕륜(王綸)이 말하기를, ‘병에는 감()과 상()과 중()이 있다. ()은 병이 털과 피부에 있는 것으로서 가벼운 것이다. ()은 피부와 근육에 겸한 것으로서 병이 꽤 무겁다. ()은 사람의 오장육부에까지 들어간 병으로 가장 무서운 것이며, 중한(中寒)이니 중풍(中風)이니 중서(中暑)니 중습(中濕)이니 중기(中氣)니 중독(中毒)이니 하는 따위와 같은 것이다.’ ()이란 말은 사악한 것이 속에 들어간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중병(重病)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즉 뇌졸중에 가운데 중자가 쓰이는 이유는 몸속에서 발생하는 병이기 때문이다. ()자는 죽음이란 뜻이다.

이튿날 내 옆 침대에 입원한 환자는 뇌경색이었는데, 뇌경색은 피가 뭉쳐 만들어진 혈전이 혈관을 막아 생긴 것으로, 뇌에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 뇌세포가 죽는 병이다. 이 환자는 다른 건 멀쩡했고 팔다리만 마비되었고 그마저도 가벼워서 다음날부터는 혼자서 걸어다녔다.

, 나의 뇌MRI를 본 레지던트가 나이는 젊은데 뇌의 노화가 심하다고 했다. 몇 개월 뒤, 담당 주치의에게 뇌의 노화가 심하다는 말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그말인즉슨, 술을 자주, 많이 마시는 여러분들의 뇌도 노화가 심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알콜은 특히 기억을 관장하는 해마에 치명적이다. 술을 끊던지 치매에 빨리 걸리던지 여러분들이 선택할 일이다.

Posted by Chul Lee
,